TABLE #2
열린 관계, 확장된 소통
서로 다른 온도 차로 인해 발생하는 물의 응결은 조용하고 신중한 소통의 모델이다. 다름을 인지하고 유지한다면, 눈물과 땀이 흐르더라도 함께 공존할 수 있다.
– 양혜규,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O2 & H2O》, MMCA 전시 브로슈어 작가의 말 발췌
양혜규 작가의 국내 네 번째 개인전이 올해 9월 말부터 내년 2월 말까지 약 5개월간 국립현대미술관(이하 MMCA)에서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라는 연례전에 양혜규 작가가 선정되었다. 작가는 늘 결핍과 소통을 밀접하게 이야기해오곤 했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블라인드를 사용한 작품에는 <침묵의 저장고 – 클릭된 속심>(2017), 작가 자신이 존경하는 개념예술가 솔 르윗SOL LEWITT의 작품을 뒤집은 <솔 르윗 뒤집기> 연작 등이 있다. 블라인드라는 소재야말로 그의 작품 이면에 깊이 심긴 인간 존재의 양면적 감정과 모순성, 인간관계의 어려움, 경계와 비경계를 아우르는 소통에 적합한 상징적 소재라고 볼 수 있다. 강해 보이거나 대담해 보이고 싶지만, 인간 존재의 내면과 그 심연은 약하고 여려서 상처받기 쉽거나 다치기 쉽다.
타인에게 보이고 싶으나 보이기 싫은 감정 같은 필연적 갈등과 결핍이 재료 해석의 주요한 맥락을 이룬다. 이러한 결핍은 전등의 빛, 푸른 색 블라인드, 허공에서 흔들리는 틈이 만들어내는 그 설치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비로소 인간의 ‘속심’으로 마주할 수 있다. 링거대에 전선을 휘감아 전구를 매달고 여러 일상적 사물을 배치해 중간 유형의 설치 조각으로 보여준 <전사 신자 연인>(2011)은 그 자체로 복잡하고 결핍된 인간 존재를 연상케 했다. 작가를 관통하는 주제인 ‘인간관계의 결핍과 소통’은 소재, 크기, 형태는 달라도 맥락을 같이한다. 이번 전시 《O2 & H2O》는 “과학적 사실과 지식이 구성하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을 오롯이 인지할 수 없는 우리의 경험과 감각계를 은유적으로 함의”한다. 그간 다층적 구조와 의미를 통해 인간관계의 결핍과 소통의 현상을 집중해 보여주었다면, 더 통합적 사고로 인간과 우주와 세계의 관계와 소통을 바라본 것은 아닐까.
앞서 언급한 〈공기와 물〉 작품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시겠어요?
주유소에서 볼 수 있거나 연상할 수 있는 물질은 단연 기름, 휘발유예요. 공기와 물은 주유소와 연관시켜 돌출되는 주된 물질은 아니라고 볼 수 있죠. 부차적인 물질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어 버린 그 표지판을 통해 문맥에 따른 의미의 전환을 비로소 일상에서 느꼈고, 그런 언어적 경험이 제게 강한 인상을 남겼어요. 여기서 탄생한 두 점의 선반을 활용해 만든 작품 〈공기와 물〉은 언어적 경험을 물건의 기능성에 빗대어 제작한 것 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꽉 들어찬 선반도, 거의 빈 선반도 모두 기능을 거부하고 있지요. 어떤 물건의 기능성이란 설치돼 맥락에 따라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죠.
이번 전시에 맞춰 다양한 아이템이 출시됩니다. 전시 연계 상품은 물론, 패션 브랜드 커스텀멜로우와 함께 선보이는 컬래버레이션으로 전시 바깥의 구성까지 관람객에게는 특히 시각적으로 더욱 흥미로운 요소일 것 같습니다. 특히 커스텀멜로우와의 컬래버레이션에는 가방, 셔츠, 코트, 모자, 장갑, 등 그 구성이 매우 다양합니다. 커스텀멜로우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선정된 제품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어요?
이번 전시의 포스터 그래픽, 4인조 조각 <소리 나는 가물家物>, 서울박스 내 설치되는 블라인드로 구성된 대형 원통형의 설치물 <침묵의 저장고 – 클릭된 속심>과 <오행비행>, <디엠지 비행>, <목우공방 – 108 나무 숟가락> 등 작품의 이미지, 작품 제작에 활용된 재료, 그래픽 요소들을 활용해 의류는 물론 다양한 아이템으로 만들었어요. 코트와 재킷, 티셔츠 등의 의류와 액세서리를 포함한 약 30개의 제품이 출시되죠. 일부 티셔츠 상품은 MMCA내의 아트 숍과 온라인에서만 판매됩니다. 기존 커스텀멜로우가 남성 위주의 제품과 사이즈를 제작해왔다면, 이번 콜라보레이션에서 보다 폭넓은 전시 관람층을 고려해서 일부 제품들은 XS 사이즈로도 제작됐어요.
2020년 9월부터 2021년 2월 28일까지 약 5개월간 국립현대 서울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 O2 & H2O》를 앞두고 있습니다. (인터뷰 당시 8월) 2014년부터 매년 국내 중진 작가 1인을 지원해온 해당 전시의 작가로 선정된 데에 대한 감흥은 어땠나요?
일단 감흥은 별로 없었고요. 저는 제게 주어진 일에 별 질문 없이 임하는 경향이 있고, 다만 ‘어떻게 잘하냐’에 집중해요.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죠. 전문가로서 소속 분야의 허와 실을 잘 알고, 그 뒤의 어려움도 너무나 잘 알아요. 완성도를 위해 쏟아 부어야 할 어마어마한 노동량, 표도 나지 않지만 충실하게 잘 다져야 할 과정과 절차 등을 생각하면 전시 초대가 항상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는 게 안타깝죠. 다만, 한국에서 아직 많은 개인전을 하지 않았고, 국공립기관에서 전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 지점을 유의미하게 여겼습니다. 아무리 문턱을 낮춰도, 갤러리에는 보이지 않는 문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느정도 예술 분야에 자신감 있는 방문객이 주를 이루죠. 극단적인 예로 사회적 약자 계층이 대형 버스를 대절해서 갤러리에 전시를 보러 오기는 어려운 반면, 국공립기관은 정말 어떤 방문객도 어려움 없이 입장이 가능한 곳이에요. 남미의 3대 비엔날레 중 하나인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하기 위해 2006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리오와 상파울루를 제외한 브라질을 통틀어 규모 있는 미술관이 전무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전국에서 수십 대의 대절 버스로 사람들이 이 비엔날레를 보러 왔고, 비엔날레 입장료가 따로 없었어요. 이것이 첨단의 현대미술을 이해하느냐 아니냐는 이 상황에서 결코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어요. 그러던 중 비엔날레 팀에서 전국으로 보낼 미술 교재를 만든다고 전시 출품작에 관해 제게 이것저것 물은 적이 있어요. 비엔날레 직원들은 빈부격차가 심한 브라질에서 가장 민주적인 장소가 해변 다음으로 바로 이 비엔날레라고 말하더라고요. 저에게도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일반 대중)’에게 예술의 공공성의 일환으로써 공식적으로 작품을 선보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작가의 관심사는 끊임없이 변화 및 확장해오고 있습니다. 인물과 사건, 현상을 포함하는 작가의 방대한 문화적 참조물들은 복합적인 조각과 대형 설치 작품을 통해 작가만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조형 세계와 조형 언어로 보여주고 있죠. 작가의 전시명과 작품명은 늘 평범하지 않은 아우라로 우리에게 건네 집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O2 & H2O》입니다. 제목을 짓게 된 발단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떤 전시 제목은 그 전시의 핵심을 이루는 한 작품에서 유래하기도 하고, 전혀 전시 작품과 상관 없기도 합니다. 지난 2002년 《공기와 물》이라는 전시에서는 주유소에서 우연히 공기와 물이라는 단어와 화살표가 적힌 표지판을 목격하고, 그 경험을 영감으로 삼아 제작한 작품의 제목과 동명이죠. 2020년에는 아마도 지칭하는 물질은 동일하지만, 표현하는 형식언어가 바뀌었어요. 영어나 한국어 등으로 불리는 ‘언어’라는 개념에서 ‘화학 공식’이라는 형식으로 말이죠. 즉, 제목의 변화를 통해 지시하고자 하는 바는 ‘표현 방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공기와 물은 존재하는 실체예요. 이를 우리가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것은 시대의 발현, 우리의 선택이죠. 언어를 선택하는 것과 관련한 문화적 담론이 화학 공식으로 전환된 것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표현 방식이 무엇인지를 가리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이 발생한 이후, 세계의 국면이 바뀌고 있잖아요. 이에 따라 화두 역시 환경과 과학, 무생물과 인간 문명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되었어요. 익숙하게 보고 말하던 실체인 공기와 물을 과학계에서 주로 통용되던 O2 와 H2O로 일상적으로 얘기하게 된 만큼, 모국어와 외국어 그리고 세계 공통어 등으로 구분되는 문화적인 혹은 인류학적인 언어체계에 대한 논의도 동시적으로 전개됩니다. 과연 이 화학 공식은 완전히 다른 언어인지, 문화적으로 구분된 기존의 언어 양식이 지시하는 물질과 과학적 양식이 가리키는 물질이 과연 동일한 것인지, 어떤 언어가 더 정확한지, 순수한 추상성을 구현하고 있는지, 이제까지 천착했던 언어를 버리고 또 다른 번역을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전시 제목에서부터 대중과 관람객에게 다양한 의문을 던질 수 있게 되죠.
〈소리 나는 가물家物〉(2020) 설치 전경, Ⓒ홍철기
이번 전시를 아우르는 중심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이번 전시는 ‘응결’, ‘공기와 물’, ‘O2 & H2O’ 크게 세 가지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 사이에서 일어난 전환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더운 수증기가 찬 물병 표면에 응결되어 물이 되듯, 대부분 물질은 온도나 기타 조건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해요. 여기서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물질의 상태, 그 의미에 주목해보고 싶었어요. 응결은 제게 있어 사람들 간 언어를 통하지 않은 소통의 은유예요. 찬 물병이 놓여 있고, 굳이 병뚜껑을 열지 않고도 병 밖으로 ‘탈출’한 물을 소통의 증표로 바라볼 수 있어요. 이 물은 차이와 다름을 인내 혹은 유지했기에 통했고, 무언의 동의 아래 밖으로 나올 수 있었어요.
〈침묵의 저장고 – 클릭된 속심>(2017), Ⓒ홍철기
〈목우공방 – 108 나무 숟가락〉(2020) 설치 전경, Ⓒ홍철기
〈디엠지 비행〉(2020) 설치 전경, Ⓒ홍철기
작가의 작품이 커스텀멜로우와의 컬래버레이션 굿즈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색다른 작업이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의류 관련 굿즈 아이템이 굉장히 다양했어요. 사실 액세서리까지 할 줄 몰랐어요. 제가 만드는 조각들은 특정한 형태를 띠는 동시에 트랜스포머와 같은 성질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이번 전시의 그래픽을 활용한 양말 두 켤레가 종이 상자에 담기는데, 그 종이 포장 케이스를 밖으로 다르게 접으면 휴대폰을 거치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 되었더라고요. ‘선한 의도’도 마음에 들었지만, 변환, 전환 같은 의미가 제품 패키지에 담겨 있어서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컬래버레이션 제품 혹은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디테일이 인상적이에요. 재킷의 호주머니, 안감 같은 것들이요. 커스텀멜로우에서 저희가 작업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도구들을 알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도구들의 모양에 맞게 워크 재킷의 포켓 디자인을 연구한다고 해서 신기했어요. 비슷한 예로, 전시와 연계해서 발간하는 선집과 도록의 크기와 두께에 맞추어 커스텀멜로우에서 제작하는 토트백의 사이즈를 정하더라고요. 그런 점도 흥미로웠어요.
파리에 위치한 라파예트 백화점의 쇼윈도 디스플레이, 메종 에르메스 서울의 리빙층에 상설 설치한 작품 등 브랜드 등과의 협업 역시 작가가 전개하는 전시 활동만큼이나 매우 본격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커스텀멜로우와의 협업에 매료된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무슨 일을 할 때 기준이나 원칙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 왜 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답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라파예트의 경우 경험도 전무하고 망할 수도 있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작업을 했어요. 제 의지와 아이디어로 이끌어 나가는 본 작업과 달리 협업이란 상대에게 맡기거나 의지해야 하는 부분도 크죠. 작업의 배경이나 이제까지의 발전 과정을 전달한 후에는 사실 협업자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아요. 제 방식을 협업자에게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커스텀멜로우 방식으로 제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의미 있는 거죠. 기존의 전시 형식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현재의 불명확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와 방식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봤어요. 그래서 저 역시 이번 컬래버레이션을 잘해보고 싶었고요.
오래전에 국내 어느 패션 잡지의 베를린 통신원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가 확고한 작가에게 패션이나 옷에 대한 자신만의 취향이나 주관도 확고한 편인가요?
패션 잡지의 베를린 통신원으로 일한 이유는 패션에 대한 관심보다는 생계형으로 시작한 글쓰기였어요. 물론 과거에는 패션에 대한 취향이 나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거의 없어졌어요. 이제 전 할머니 상태거든요(웃음). 감각이나 취향보다 디그니티DIGNITY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이번 커스텀멜로우와 함께 작업하며 기대한 바가 있던가요?
마치 전시장에 전시된 작업에 캡션이 달리듯이 의류에 해당 작품의 설명문이 레이블로 달려 있거나 작품 이미지 아래에 인쇄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치 걸어 다니는 전시장 느낌이 들거든요. 제 작업이 입을 수 있는 의류나 액세서리가 되어서 미술관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향한다는 게 가장 큰 관심 포인트예요. 혹시 이것이 어디서 전시된 누구의 작업이라는 점을 모른다 하더라도 무심코 전시의 문턱, 전시의 문지방을 넘어 자연스레 경계를 무너뜨리는 긍정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전시 도록의 출판뿐만 아니라 전시를 주최하는 기관과 함께 연계상품을 만드는 일에 부쩍 관심이 가요. 상품 개발을 단순히 전시의 홍보로만 여기는 대신, 다양한 일반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편으로 고민해봐요. 그런 점에서 이번 커스텀멜로우와의 컬래버레이션이 고민할 기회와 경험을 주는 계기가 됐어요.